허동보의 일히일비(17) - 가진 게 없다는 것

통장 잔고 1만 원 미만의 삶, 책 한 권에 기대어 버틴 자존심

아무것도 없었기에 마주한 선물… 가족, 그리고 매일의 기도

결핍은 불행이 아닌 빈 공간, 신이 연출한 성장 드라마의 시작

 

אַיִן (아인) - 없다, 무(無), 부족하다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창 37:30)


'없다'는 것은 '결핍'을 말한다. 정말 지지리도 없는 삶이었다. 없어도 없어도 이렇게 없기는 힘든 삶이었다. 단 한 순간도 내 집을 가진 적이 없었고, 내 차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학자금 대출이 없었다면, 공부조차도 할 수 없었다. 연말에 통장을 들여다보면 항상 잔고는 1만원 미만이었다. 그래서일까? 자존감은 낮아지고 자존심만 드세졌다.

 

책은 사람들이 그냥 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점점 더 책에 집착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학교에서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한 녀석이 책장 서너 개가 가득 찰 정도의 책은 항상 갖고 있었다. 이사 때마다 이삿짐센터에서 기겁을 하곤 했다. 그나마 책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거만한 표정과 자세로 살아갈 수 있었던 듯하다. 나에게 있어서 책은 일종의 '자랑질'이었다.

 

책 말고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일종의 자긍심처럼 작용한 것은 아닐까? 속된 말로 '눌러봐야 똥밖에 안 나오는 상황'에서 "나는 저 천박한 것들과는 급이 달라."라는 식의 정신승리는 결핍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포장이었다.

 

사실 결혼 전, 40대 초반 즈음에 몇 번 소개팅이라는 것도 해봤다. 정말 아무것도 안 보고 믿음만 본다는 사람들도 소개를 받아 봤다. 그러나 돈도, 미래도 없이 거만해 보이기만 하는 노총각을 책임져 줄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하긴 그녀들의 수많은 거절 덕분에 지금 내 아내와 미래를 꿈꾸며 살아갈 수 있게 된 점은 참으로 감사하다.

 

나는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과 가족을 이룰 수 있었다.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책에 빠져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매일 엎드려 기도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없다'는 것은 '결핍'을 말한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은 결핍으로 인해 좌절하고 아파한다. 그리고는 마치 결핍이 좌절과 아픔을 가져다 준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결핍은 좌절이나 아픔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결핍이 없는 삶은 더 채울 공간조차 없다. 결핍은 오히려 희망과 성장과 채움을 가져다 준다.

 

나는 지금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진 않다. 그러나 풍족하지 않음이 곧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결핍의 삶을 함께 살아가 주는 가족이 있기에 행복하다. 그리고 가족이 있기에 삶의 희망을 가지고 성장을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대부분 결핍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없이 산다는 것은 신이 나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성장 드라마는 아닐까? 내가 주인공이자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드라마.

 

'없다'는 것, 결핍은 -'불안'이 따라오는 것만 제외하면- 내 인생에서 받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였다.
 

 

 

허동보 목사(Rev. Huh Dongbo) | 수현교회(Suhyun Church)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AI시대, 히브리어로 답하다』 외

 

 

 

작성 2026.06.17 05:11 수정 2026.06.17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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