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구리인가 고구려인가(下)
- ― ‘리’는 구리(九黎)에서 왔고, 누가 끊었는가
상편에서, 우리 국호의 본음이 글자와 무관하였으며
일관되게 ‘리’였음을 사서의 주석과 음운학으로 확인하였다.
이제 두 가지 물음이 남는다.
그 ‘리’는 어디에 뿌리를 두는가.
그리고 수천 년을 살아남았던 본음이 어쩌다 ‘고려’로 굳어 버렸는가.
- ‘리’는 어디서 왔는가― 구리(句驪)와 그 위의 九黎
상편에서 보았듯 『후한서』는 高句驪와 句驪를 섞어 썼고,
句驪는 ‘高’가 생략된 형태였다.
그렇다면 굳이 句驪라는 표기를 남긴 이유를 되짚게 된다.
실마리는 『사기』 오제본기의 주석에 있다.
사마천은 황제(黃帝)를 높이려는 장치로 치우(蚩尤)를 등장시켜 깎아내렸으나,
후대 주석가들의 진실한 고백은 사뭇 다르다.
남조 송(宋)의 배인은 『집해』에서
“蚩尤古天子(치우는 옛 천자다)”라 하였고,
당 중기의 장수절은 『정의』에서
“九黎君號蚩尤(구리 임금의 호가 치우다)”라 하였다.
곧 치우는 황제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구리(九黎)’라는 나라를 다스린 천자였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반면에 황제에 대해서는 같은 주석서들이
‘유웅(有熊)’이라는 호와 ‘소전국 임금의 次子(차자)’라는 모호한 해설에 머물러,
나라 이름조차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치우와 그 나라 구리에 대한 명쾌함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이제 음운 고증과 이 기록을 겹쳐 보면,
句驪의 ‘句·驪’와 九黎의 ‘九·黎’가
음이 같은 ‘구리’로 귀결된다는 사실이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려워진다.
물론 음(音)이 같다고 하여 완벽하게 계승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①국호의 핵심이 일관되게 ‘리’이고,
②그 앞 글자 역시 ‘구’로 일치하며,
③정사의 주석이 ‘구리’를 천자의 나라로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는
세 가지가 겹칠 때, 句驪가 九黎를 잇는 국호일 가능성은 충분히 무게를 갖는다.
이 가능성은 다른 사료로도 보강된다.
『예기』 정의 권55는 “言苗民者 有苗 九黎之後
(‘묘민’이라 한 것은 유묘가 곧 구리의 후손이라는 뜻이다)”라 하였다.
또 고리 말 범장(范樟)의 『북부여기』 하편은
“渡九黎河 追至遼東西安平 乃古稾離國之地
(구리하를 건너 추격하여 요동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 땅이었다)”
라 하여, ‘구리하’와 ‘고리국 땅’을 한 지리 공간 안에서 잇고 있다.
앞의 것은 정사 주석이라 검증이 가능하고,
뒤의 것은 사학계에서 위서라 하든 말든
우리 측 사료로써 방증이 된다.
두 기록의 위상이 다름은 밝혀 두되,
방향이 일치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高(고)라는 접두어의 뜻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단지 미칭(美稱)이 아니라,
구리를 이은 위대한 나라임을 드러내는 표지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이 마음의 고향으로 삼는 고구리는,
그 이름 안에 이미 조선 이전 최초의 나라 구리를 품고 있었던 셈이다.
〔삽화④〕‘九黎→ 句驪→ 高麗’ 계승 도식. 위의 도표
- 정식국호는 고리인가 고구리인가
국호의 사용 빈도를 살펴보자.
통전·태평어람·태평광기는 기존 사서를 그대로 옮겨
국호가 겹쳐 통계를 훼손하므로 제외하고, 정사만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史記 사기 | 漢書 한서 | 後漢書 후한서 | 三國志 삼국지 | 晉書 진서 | 魏書 위서 | 宋書 송서 | 南齊書 남제서 | 梁書 량서 | 陳書 진서 | 隋書 수서 | 舊唐書 구당서 | 舊五代史 구오대사 | 宋史 송사 | 합계 |
高麗 고리 | 0 | 0 | 0 | 2 | 0 | 169 | 23 | 11 | 15 | 6 | 110 | 207 | 31 | 155 | 730 |
高句麗 고구리 | 0 | 0 | 2 | 10 | 22 | 19 | 0 | 0 | 0 | 0 | 1 | 0 | 0 | 1 | 55 |
高句驪 고구리 | 0 | 6 | 20 | 5 | 13 | 0 | 7 | 0 | 6 | 1 | 0 | 1 | 0 | 1 | 60 |
이 수치를 한 눈에 보이도록 막대그라프로 표시하였다.

이 표를 작성하며 읽어낼 수 있던 점은 다음과 같다.
- 1) 정사 전체를 합산하면 高麗(고리)가 730회로
- 高句麗·高句驪(합115회)를 압도한다.
- 후대로 갈수록 ‘高’를 생략한 ‘고리’가 정식 국호로 정착해 갔다.
- 2) 북위의 사서인 『위서』는 고구리와 종족적·지역적으로 가까웠고
- 존속기간이 길어 관련 기사가 풍부한데, 여기서 ‘고리’ 표기가 두드러진다.
- 3) 선비족이 세운 수·당은 돌궐 등의 종족과 밀접하여
- 고구리 연방체계와 애증이 얽힌 만큼 기사가 많고,
- 『수서』·『당서』 모두 ‘고리’로 적었다.
- 4) 남조의 송·제·량·진은 존속이 짧아 기사가 적으나,
- 특히 남제는 백제 동성왕의 활약을 남겨 백제의 진면목을 전한다.
- 5) 왕건의 고리와 국경을 맞댄 『송사』는 기사도 많지만, 거의 ‘고리’ 일변도다.
- 살아있던 발음, 누가 끊어 놓았는가
요컨대 시대에 따라 麗와 驪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으며,
글자가 무엇이든 발음은 ‘리’로 귀결되었다.
본음 ‘리’는 사서가, 자전이, 노인의 입말이 한결같이 증언한다.
그렇다면 ‘고려’라는 발음은 어디서 비롯되어, 어떻게 온 국민의 상식이 되었는가.
그 끊긴 자리에 일제(日帝)가 있다.
글(契)에 어두웠던 조선총독부는
1920년 『조선어사전』을 펴내며
우리 국호를 ‘고려’로 적었다.
살아 있던 발음의 맥을, 식민 통치의 손이 끊어 놓은 것이다.
일본인이 펴낸 이 사전에 자극받아
조선의 지식인들도 뒤늦게 같은 이름의
우리말 사전을 만들고자 어휘를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재정도 넉넉지 못하였고 연구자들의 분열까지 겹쳤다.
그 어려움 속에서 1938년, 문세영 선생이
李允宰(이윤재)의 지도와 韓澄(한징)의 지도로 십수 년을 매달려
마침내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을 내놓았다.
광복 후 한글학회의 『큰사전』(1957)이 나오기 전까지
사실상 유일한 우리말 사전이었으니, 그 노고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 표기의 ‘기준’이다.
문세영의 사전은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그대로 따랐고
‘고리’ 또한 조선총독부 ‘조선어사전’을 따라 ‘고려’라고 하였다.
일본인이 잘못 적은 발음을 바로잡기는커녕,
그 위에 세워진 규칙을 따랐던 것이다.
침략자의 왜곡을, 우리말을 지킨다던 이들이 ‘표준’이라는 이름으로 굳혀 버린 셈이다.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한글학자’라는 이들은 과연 어떤 학문적 바탕을 지녔는가.
이른바 한글 연구의 비조로 떠받들어지는 주시경은,
독립신문에서 삼 년 남짓 글을 다듬는 교정 일을 맡으며
우리말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고 알려졌다.
배재학당에서 얼마간 배운 것을 빼면,
음운학을 정식으로 닦은 학문적 이력은 빈약하다.
실상 주권을 잃은 시기에 서양식 언어학을 제대로 교육받은 이는 거의 없었다.
정음(正音)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이는 오히려 변호사 박승빈이었으니,
그는 집안에 전해 오던 ‘훈민정음’ 원본을 바탕으로
세종의 글자 만든 이치를 파고들었다.
심지어 그는 1932년 ‘훈민정음 중간본’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1914년에 돌아간, 주시경에 관련된 어느 연구에도
그가 훈민정음을 읽었다는 증언이 없다.
뒤집어 말하면, 표준을 정한 그 ‘한글학자’들은
세종이 정음을 지은 제자원리(制字原理)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우리말의 규범을 세웠다는 뜻이다.
그 결과가 오늘의 처참한 정음이다.
세상 어느 언어에도 강요되지 않는 두음법칙과 구개음화를 규칙으로 못 박았고,
정음 넉 자가 사라지는 것에도 함께 동조하였다.
본디 세종이 유성음을 적고자 고안한
자음 겹쳐쓰기(各自並書<각자병서>; ㄲ·ㅆ 따위)는 된소리 표기로 둔갑하였고,
그 바람에 자음을 나란히 써 본뜻을 함께 담던 옛 표기법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테면 ‘땅’은 본디 ‘
(ㅅ+당; 이런 겹쳐쓰기는 合用竝書<합용병서>)’이었으니,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의 ‘스탄’과 같은 말, 같은 소리다.
그 표기를 없애 버리자 오늘의 젊은이들은 그 나라들과 우리가 아무 인연도 없는 줄로 안다.
끊어진 것은 글자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본디 누구와 한 갈래였는가 하는 기억이었다.
(정음 훼손의 전모는 그 자체로 장편의 글을 요하므로,
여기서는 발음 왜곡의 뿌리가 이 ‘무지’에 닿아 있음을 가리키는 데 그친다.)
제 나라 국호의 본음 하나 가려내지 못한 이들이 우리말의 규범을 세웠고,
이 왜곡은 학교를 거치며 굳었다.
주입식 교육으로 ‘고려’는 의심할 수 없는 상식이 되었고,
대중은 제 나라 이름이 본디 ‘고리’였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실수를 바로잡는 것이 교육이건만,
우리 교육은 거꾸로 실수를 고착시키는 길을 택한 것이다.
- 자국민만 모르고, 세계인은 모두 아는 이름
기이한 일이 있다. 세계인은 우리를 한결같이 “Korea, 코리아”라 부른다.
발음의 뿌리에 ‘리’가 또렷이 살아 있다.
정작 그 이름의 주인인 우리만이 “고려”라 한다.
바깥 세상은 본음을 지켜 부르는데,
안에서는 침략자가 끊어 놓은 발음을 제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섬에 갇혀서, 발전하던 대륙과 문명의 교류가 끊겨
契(글)에 무지하였던 일본인을 따라,
그것도 제 나라의 국호를 잘못 발음한다는 사실은,
부끄럽다 못해 낯을 들 수 없는 일이다.
억장이 무너진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발음은 죽지 않고 노인들의 입말에 아직 살아 있으며,
사서와 자전이 본음을 또렷이 증언한다.
우리 국호 ‘고리’ 안에는
조선 이전 최초의 나라 구리(九黎)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끊긴 맥을 다시 잇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