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시대를 위한 철학적 이정표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 읽는 현대 사회(45)

나의 중심을 점령한 수많은 가짜 신들로부터의 해방

절대적 기준을 상실한 포스트모던 사회의 공허함

인생의 모든 선택을 결정짓는 단 하나의 질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5문

 

Q. Which is the first commandment? A. The first commandment is,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문. 제1계명은 무엇입니까? 답. 제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AI 이미지 (제공: 미디어 울림)


인간은 본질적으로 ‘예배하는 존재(Homo Adorans)’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믿는 대상을 향해 시간과 열정, 그리고 생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현대 사회에서 이 대상은 과거의 목상이나 금송아지 같은 형상이 아니라, 성공, 권력, 인정, 혹은 자기 자신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5문이 다루는 제1계명은 단순히 종교적인 배타성을 강조하는 법 조항이 아니다. 이는 파편화된 현대인의 자아를 통합하고, 무너진 존재의 질서를 바로잡는 형이상학적인 선언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명령에서 ‘나 외에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 파나이(עַל-פָּנָי, al-panai)’는 문자적으로 ‘내 얼굴 앞에’ 혹은 ‘나와 대면하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의 장에 그 어떤 불순물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는 단호한 요청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제1계명을 어기는 행위는 ‘자아의 파편화’와 직결된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현대인이 우상 숭배에 빠지는 이유를 ‘자신의 역량을 외부의 대상에게 투사하고 그것에 예속됨으로써 안정감을 얻으려는 시도’라고 분석했다. 우리가 돈이나 명예를 신의 자리에 올려둘 때, 우리는 그것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된다. 내가 소유한 것들이 나를 정의하게 되는 순간, 소유의 상실은 곧 존재의 소멸로 이어진다. 반면 제1계명은 인간에게 ‘절대 타자’를 설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진정한 주체성을 부여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세상의 허무한 가치들로부터 독립된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제1계명을 경제학적 측면에서 보면 ‘희소 자원의 우선순위’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지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먼저 배치하느냐가 그 사람의 실질적인 ‘신(God)’을 결정한다. 현대 비즈니스 세계에서 성과 지표(KPI)가 지상 과제가 될 때, 인간 관계와 윤리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제1계명은 우리에게 궁극적 관심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종교를 ‘궁극적인 것에 사로잡힌 상태’라고 정의했다. 만약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에 머문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실존적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피조물은 결코 인간 영혼의 심연을 채울 만큼 영원하거나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1계명은 우리 삶의 ‘북극성’을 고정하는 작업이다. 항해사가 북극성을 기준으로 방향을 잡듯,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절대 기준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 이 계명은 우리에게서 즐거움을 빼앗으려는 구속이 아니라, 가짜 신들이 주는 신기루 같은 약속에 속지 말라는 자애로운 경고다. 우리는 날마다 마음의 보좌에 누가 앉아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내가 가장 의지하는 것, 나의 분노가 폭발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살펴보면 그곳에 숨겨진 우상의 얼굴이 드러난다. 제1계명을 지키는 것은 이 가짜 신들을 축출하고, 내 존재의 중심을 창조주께 되돌려 드리는 거룩한 혁명이다.

 

현대인의 우상은 더 이상 신전에 있지 않고 스마트폰 화면과 통장 잔고, 그리고 타인의 '좋아요' 속에 숨어 있다. 제1계명은 이러한 파편화된 욕망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울타리다. 하나님을 제자리에 모실 때 비로소 돈은 도구가 되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되며, 자기 자신은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 질서가 잡힌 삶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의 시작은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데서 시작된다.

 

 

 

허동보 목사 | 수현교회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AI시대, 히브리어로 답하다』 외

 

 

 

작성 2026.03.11 14:48 수정 2026.03.1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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