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무너지면 문명도 무너진다

행운의 종족이 물려받은 두 기둥

스스로 망가뜨리는 말 — 일본어 찌꺼기와 외국어 범람

말을 바로잡는 일이 역사를 바로잡는 일

 

 

말이 무너지면 문명도 무너진다

— 우리 글의 두 기둥과 오늘의 위기 —

 

 

가. 말과 사고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 생각하고 말을 하는가, 아니면 말이 있어야 생각이 자라는가. 

오랫동안 학자들이 다투어 온 물음이지만, 

오늘날 언어학과 인지과학은 이렇게 정리한다. 

'말과 사고는 서로를 키우는 쌍방향 관계'라고. 

낱말 하나가 없으면 그 개념을 머릿속에서 구축하기 몹시 어려워지고, 

반대로 선명한 개념이 생기면 그것을 담을 말이 새로 태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문명의 발달은 새로운 언어를 계속 창발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말은 소통의 도구인 까닭에, 

변하면 소통의 단절을 초래하므로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이중의 긴장 속에 놓여 있다.

 

그 때문에 말의 왜곡은 단순한 언어적 실수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뒤틀린 말은 뒤틀린 사고를 낳고, 뒤틀린 사고가 쌓이면 사회 전체가 흔들린다. 

사람들이 같은 낱말을 전혀 다른 뜻으로 쓰기 시작하면, 

대화는 껍데기만 남고 사회적 합의는 모래 위의 성처럼 무너진다. 

고고학적 발굴이 보여 주는 찬란했던 문명들이 갑자기 단절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어쩌면 소통을 잃은 말의 붕괴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고 두려운 일이다.

 

 

 

나. 행운의 종족이 물려받은 두 기둥

 

한국인은 글쓰기의 역사에서 특별히 복 받은 국민이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체계의 언어와 문자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契(글·서글)이다. 

35년 일본 지배의 여파로 흔히 '한자'라 불리지만, 

이 글자 체계는 본래 고대 상(商)나라 사람들이 빚어낸 상형문자에서 비롯하였다. 

상나라 사람들과 우리 겨레는 북방에서 내려와 

환황해 문명권을 함께 이룩한 혈연·문화적 공동체로서

(1월 10일자 '동이 | 황해는 경계가 아니다' 참조), 

이 문자는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 문명의 뼈대이기도 하다. 

뜻을 담는 그릇으로서 수천 년을 버텨 온 이 글자는, 

개념의 역사와 철학을 압축해 담고 있어 오늘도 여전히 강력한 사유의 도구다.

 

둘째는 正音(정음)이다. 

세종대왕이 1443년에 창제한 이 문자는, 

'소리를 바르게 적는다'는 뜻 그대로,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발성기관의 모양과 자연의 작동 원리에 따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기호로 만든 것이다. 

세계 언어학자들이 '가장 체계적인 문자'라고 손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뜻글자인 契와 소리글자인 正音을 함께 사용한다는 사실은, 

개념의 깊이와 발음의 정확성을 동시에 확보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두 체계를 아울러 가진 종족은 세계 역사에서 매우 드물다.

 

 

청산하지 못한 일본어, 무분별한 외래어와 외국어; 누구에게 도움이라도 되는가?

 

 

다. 스스로 망가뜨리는 말 — 일본어 찌꺼기와 외국어 범람

 

그 귀한 유산을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쓰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두 가지 방향에서 스스로 허물고 있다.

 

하나는 일본어의 흔적이다. 

국권 상실기를 거치며 일본식으로 변형된 말들이 

지금도 일상 깊숙이 박혀 있다. 

'반도', '구한말', '한자'처럼 역사성과 논리성이 없는 낱말들, 

'견습(見習)', '수속(手續)', '할인(割引)', '입장'처럼 

일본어 독음(讀音)의 틀로 굳어버린 낱말들이 대표적이다. 

이 낱말들은 우리 식으로 읽을 때 본래 뜻과 어긋나거나, 

아예 일본어의 발상과 문법 구조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말을 통해 사고가 형성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고의 일부가 여전히 남의 언어 틀 안에 갇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외래어와 외국어의 무분별한 남용이다. 

영어 낱말을 한국어 발음으로 옮긴 말들이 홍수를 이루고, 

굳이 우리말을 쓸 수 있는 자리에서도 

영어 소리를 빌리는 것이 세련된 듯한 풍조가 퍼져 있다. 

'콘텐츠', '플랫폼', '디폴트값'처럼 전문 분야에서 불가피한 경우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 '세계', '지구촌'이라는 대체 가능한 낱말을 버리고 

발음조차 쉽지 않은 '글로벌'을 남용하거나, 

'우리 포지션리셋하고 레버리지를 극대화하겠다'는 식의 말이 

공식 자리에서도 거리낌 없이 쓰이는 현실은, 

우리말의 뼈대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경고 신호다.

 

 

 

라. 正音의 원칙 — 소리를 바르게, 뜻을 온전하게

 

세종이 정음을 만든 뜻은 분명하였다.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정음은 소통에 걸림이 없도록 

소리를 정확하게 적어 뜻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 본래 원칙은 뜻과 소리가 한 몸처럼 이어져 

세계 누구와도 소통될 수 있는 문자를 지향한 것이었다.

 

그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 맞춤법 논쟁의 과정에서였다. 

두음법칙이나 구개음화 등으로 같은 뜻의 말이 

달리 발음되는 현상을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음 원칙과, 

형태소를 고정하여 눈으로 읽는 편의를 높이는 형태음소 원칙 

사이의 갈등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어느 쪽이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이러한 갈등이 생겨났는지, 

正音이 처음 품었던 근본 정신을 되새기는 일이다.

 

 

 

마. 말을 바로잡는 일이 역사를 바로잡는 일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것을 담는 말이 먼저 바로서야 한다. 

지명 하나, 인명 하나가 어떤 글자로, 어떤 소리로 전해져 왔는지가 

때로는 역사의 진실을 가르는 열쇠가 된다. 

뒤틀린 말로 쓴 역사는 뒤틀린 사고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자의든 타의든 미래 문화와 문명을 선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소통되는 어휘를 명쾌하게 개념화하지 못한다면, 

인류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음을 자각하여야 한다. 

밝은 미래를 제시하는 일은 바른 말에서 시작된다.

 

이 신문 《우리역사와 땅》이 말의 문제를 역사와 함께 다루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역사는 땅 위에서 벌어지고, 땅의 이름은 말로 전해지며, 

말의 정확함이 문명을 발전시키고 역사의 정직함을 지탱한다. 

우리 겨레가 두 개의 훌륭한 글 체계를 물려받은 행운을 

스스로 버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이나마 꾸준히 내어 가겠다.

 

 

작성 2026.03.06 01:38 수정 2026.03.06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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