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무슬림들의 생각: 가장 슬픈 오해와 영적 전쟁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전 세계 19억 무슬림이 속고 있는 역사상 가장 슬픈 거짓말.

-왜 이슬람은 십자가를 그토록 혐오하는가?

-무슬림은 왜 십자가의 예수를 '실패자'라 부르는가?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두 개의 상징, 하나의 하늘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두 개의 상징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며 침묵 속에 대치하고 있다. 하나는 십자가요, 다른 하나는 초승달이다. 이 둘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이것은 신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신에게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십자가는 본래 로마 시대의 가장 잔혹한 처형 도구였다. 살점이 뜯겨나가고 피가 마르는 고통의 형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흉측한 나무 위에서 '사랑'을 본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스스로 그 위로 올라가심으로, 그 나무는 저주의 상징에서 구원의 다리가 되었다. 반면, 초승달은 사막의 밤을 비추는 길잡이다. 이슬람의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알라의 계시를 받던 밤,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다고 한다. 무슬림들에게 초승달은 어둠을 가르는 알라의 광채이자 진리의 표상이다.

 

문제는 이 두 상징이 가리키는 지향점이 너무나 다르다는 데 있다. 특히, 기독교의 가장 거룩한 절기인 사순절과 고난 주간, 그리고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이 틈새는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우리는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음을 고백한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토해내듯 외쳤던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 이것은 기독교라는 생명체의 심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저 초승달 아래 엎드리는 19억의 무슬림들은 이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들의 시선 속에 비친 예수는 과연 누구일까?

 

존경하지만, 구원자는 아니다: 그들이 부르는 이름 '이싸'

 

놀랍게도 무슬림들은 예수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를 ‘이싸’라고 부르며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 꾸란 곳곳에서 예수는 '메시아'로 칭해지며, 알라의 말씀이자 알라로부터 온 영(靈), 그리고 위대한 선지자로 묘사된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했다는 사실조차 믿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와 꽤 비슷한 예수를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그들이 그어놓은 선은 냉정하고 단호하다. 

 

그들에게 예수는 위대한 인간일 뿐,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이슬람 신학에서 신(알라)이 자식을 둔다는 것은, 유일신의 절대적인 거룩함을 훼손하는 신성모독(Shirk)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신의 전능함과 인간의 유한함을 철저히 분리한다. 따라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와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매달린 신이란, 그들의 논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실패한 신'의 모습일 뿐이다. 

 

한철하 박사가 칼빈의 '강요'를 인용해 설명했듯,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분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시다. 하지만 무슬림의 눈에 비친 기독교의 '성자 하나님' 개념은 유일신 사상을 배반한 다신교적 오류로 보일 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오해이자, 대화의 문을 닫게 만드는 거대한 장벽이다.

 

2. 십자가의 스캔들: "알라는 그의 선지자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정을 이룬 승리의 사건이다. 하지만 무슬림들에게 십자가는 패배와 치욕의 상징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극적인 신학적 충돌이 일어난다.

 

무슬림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를 전면 부인한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알라는 전능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선지자(예수)가 악인들의 손에 의해 그토록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 처형은 알라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이슬람 신학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알라가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고, 십자가에 달린 것은 예수를 닮은 가룟 유다나 시몬 같은 대역이었다고 가르친다(꾸란 4:157).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인 '대속(Atonement)'의 은혜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주장이다. 십자가에서 죽음이 없었다면, 피 흘림도 없었다는 뜻이다. 피 흘림이 없다면 죄 사함도 없다. 죄 사함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결국 무슬림들이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원죄'와 그 해결책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구원이 필요한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단지 올바른 지도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로 본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대신 죽어줄 구세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가르쳐줄 안내자가 필요할 뿐이다. 십자가 없는 예수, 고난 없는 영광. 이것이 무슬림들이 만들어낸, 듣기에는 좋으나 생명이 없는 반쪽짜리 예수의 모습이다.

 

원죄 없는 구원관: 행위로 쌓아 올리는 바벨탑

 

십자가를 제거해 버린 자리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바로 인간의 '행위'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거저 받는 은혜의 종교다. 그러나 십자가를 잃어버린 이슬람은 인간 스스로 알라를 기쁘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율법의 종교가 되었다.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번 기도하고, 금식하며, 자선을 베푼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동기가 구원의 확신이 아닌,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공로를 쌓기 위함이라는 데 비극이 있다. 그들은 알라가 마련해 놓은 십자가라는 다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하늘에 닿으려 바벨탑을 쌓고 있는 셈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기독교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대속, 중보, 희생, 속죄... 우리 영혼을 울리는 이 거룩한 단어들이 이슬람 세계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신은 아들을 낳지도 않았고, 낳아지지도 않았다"라는 꾸란의 구절을 암송하며 자라난 그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라는 복음은 그저 어리석은 소리로 들릴 뿐이다.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사랑만이 그 벽을 넘는다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을 향해 복음을 전할 때 마주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문화나 언어가 아니다. 바로 이 견고한 ‘반(反) 십자가 신학’이다. 그들은 예수를 모르지 않는다. 다만 '잘못된 예수'를 너무나 확신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십자가를 부인한다고 해서 그들을 정죄하고 배척해야 할까?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는 원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사랑이다. 그들이 십자가를 ‘실패’라고 비웃을 때, 우리는 십자가가 ‘승리’임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논쟁으로 그들의 신학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희생적인 사랑은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오직 우리 인류의 죄를 위해 대신 죽기 위해 오신 예수 탄생의 계절이다. 그러나, 초승달 아래서 알라를 부르는 그들의 기도가 들리는가? 그들은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선지자 '이싸'가, 사실은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던 참된 구원자였음을. 이제 우리는 기도를 바꿔야 한다. 저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수건이 벗겨지기를, 그리하여, 십자가가 치욕이 아닌, 하나님의 가장 아픈 사랑이었음을 그들이 깨닫게 되기를.

 

십자가와 초승달의 싸움은 절대 칼과 창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과 진리, 율법과 은혜, 그리고 두려움과 사랑의 싸움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만이 결국 모든 무릎을 꿇게 할 것이다.

 

작성 2025.12.19 16:38 수정 2025.12.1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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