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다 갚았는데, 왜 아직도 '희생제'를 드립니까? 아브라함의 제단과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림길

-아브라함의 제단은 왜 2천 년째 비어 있는가?

-아직도 모리아 산에서 '숫양'을 찾고 있습니까?

-그림자와 실체: 아브라함의 칼 끝에서 갈라진, 두 개의 구원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이슬람력의 마지막 달, '둘-히자(Dhu al-Hijjah)'의 열 번째 날이 밝아오면, 무슬림들의 도시는 온통 거룩한 피의 냄새와 경건한 흥분으로 가득 찬다. '이드 알 아드하(Eid al-Adha)', 즉, 위대한 희생절이다.

 

이날은 단순한 명절이 아니다. 전 세계 17억 무슬림이 그들의 신앙의 아버지, 이브라힘(아브라함)이 알라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여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그 숭고한 복종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슬람의 5대 의무 중 하나인 성지순례(Hajj)의 대장정이 바로 이날, 아라파트 평원에서의 기도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예식으로 절정에 이른다.

 

그들은 양과 소를 잡아, 그 고기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해, 하나는 이웃을 위해,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바친다. 이 거대한 나눔의 실천 속에서, '움마(Ummah)'라 불리는 그들의 공동체가 얼마나 견고하게 작동하는지 목도했다. 그들의 순종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이자 나눔의 축제였다.

 

그 경건한 축제를 바라보면, 기독교인들은 늘 한 가지 질문에 잠기곤 한다. "우리의 신앙의 뿌리인 구약성경 역시, 이 아브라함의 사건(창세기 22장)을 인류 신앙의 정점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이토록 장엄한 희생절을 기념하지 않는가?"

 

이 질문의 답은, '그림자(Glimja)'와 '실체(Silche)'라는, 두 신앙이 '희생'과 '완성'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 차이에서 시작된다.

 

이슬람의 길: 순종을 재현하는 위대한 모범

 

이슬람 신앙의 심장에는 '순종(Submission)'이 있다. 이슬람이라는 단어 자체가 '복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브라힘의 행위는, 인간이 알라에게 보여야 할 그 절대적 순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모범'이다.

 

이 이야기는 꾸란 37장 100절에서 111절에 걸쳐 깊이 있게 다뤄진다. 이브라힘은 꿈의 계시를 받고 아들에게 그 뜻을 전한다. 아들 역시 "아버지, 명령받은 대로 행하소서. 알라의 뜻이라면, 저는 인내하는 자들 가운데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꾸란 37:102)라고 답하며 아버지의 순종에 기꺼이 동참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보여준 이 완전한 복종의 순간, 알라는 그들의 순종을 시험한 것이라며 아들을 대신할 '위대한 희생 제물'(꾸란 37:107)을 보내주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꾸란의 초점이다. 꾸란은 그 아들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는다. (오랜 이슬람 전승은 그를 '이스마일'로 본다) 또한, 아들을 대신한 제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이는 제물의 '정체'보다, 그것을 바치는 부자(父子)의 '순종의 행위' 그 자체에 신학적 무게중심이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무슬림에게 '이드 알 아드하'는, 1400년 전의 그 위대한 순종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 오늘 나의 삶에서 그 순종을 재현(Re-enactment)하는 행위이다. 그들은 매년 양을 잡고 고기를 나눔으로써, 이브라힘의 순종에 동참하고 공동체의 연대를 다진다. 그들에게 이 반복은 신앙의 약화가 아니라, 세대를 이어 순종의 정신을 각인시키는 거룩한 교육의 장이다.

 

기독교의 침묵: 그림자가 실체를 만났을 때

 

그렇다면 기독교의 '침묵'은 무엇인가?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잊었는가?

 

정반대이다. 기독교 신앙은 아브라함의 이삭 희생 사건(창세기 22장)을, 구속사라는 거대한 파노라마 속에서 가장 결정적인 '예표(Type)'이자 '그림자(Shadow)'로 해석한다.

 

창세기 22장은 이 사건을 숨 막히게 묘사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절정은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끝나지 않고, 그 순종을 받으신 하나님의 '준비'로 나아간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그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창 22:2, 12).

 

그리고 아브라함이 눈을 들었을 때, 그는 아들을 대신할 '한 숫양(Ram)'(창 22:13)을 본다. 꾸란과는 달리, 성경은 그 대속물을 '숫양'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Yahweh-Yireh)'라 부른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

 

이것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이 갈라서는 '갈림길'이다. 이슬람이 이브라힘의 '순종'을 모범으로 삼아 재현하는 길을 택했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숫양'을 예표로 삼아 기다리는 길을 택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이 '여호와 이레'의 그림자였다. 율법은 장차 올 '실체'의 모형도였다.

 

완성된 제단: 더 이상 숫양을 찾지 않는 이유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 모든 '그림자'가 마침내 '실체(Antitype)'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 한 번에(Once for all),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성취되었다는 고백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를 보고 외친 선포는, 구약 시대를 관통하는 모든 희생 제사의 종결 선언이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Lamb of God)이로다!" (요한복음 1:29)

 

모리아 산의 덤불에 뿔이 걸렸던 그 '숫양(Ram)'은, 2천 년 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힌 '어린 양(Lamb)'으로 그 실체를 드러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진리를 웅변한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4). 반복되는 제사는 그것이 '불완전함'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이 '단회적(單回的) 희생'은 더 이상의 반복이나 추가적인 제사가 필요 없는, 최종적이고 완벽한 대속(代贖)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이드 알 아드하'와 같은 연례 희생 의식을 갖지 않는 것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잊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건이 가리키던 궁극적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나도 선명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완공된 집(실체)에 입주하여 살면서, 매년 그 집의 오래된 청사진(그림자)을 기념품처럼 꺼내어 축제를 벌이지 않는다. 빚을 모두 갚았다는 '완납 증명서'를 받았음에도, 매년 채권자에게 찾아가 "내가 빚을 갚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의식을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아브라함의 제단, 그 위에 남겨진 질문

 

결론적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이 근본적인 차이는 신앙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슬람은 인간의 위대한 '순종의 행위'를, 공동체적 나눔의 제사 의식을 통해 매년 반복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알라에게 나아간다. 이는 끊임없는 인간의 '노력'과 '헌신'을 통해 신앙을 증명하려는 길이다.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대속의 은혜'라는 단 한 번의 역사적 사건에 온전히 의지하여 나간다. 이는 인간의 노력이 아닌, 완성된 하나님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 길이다.

 

모리아 산의 제단이 오늘날 비어 있는 이유는, 그 제물이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비어 있음'은 망각의 흔적이 아니라, '완성'의 증거이며, 더 이상 동물의 피가 아닌 아들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의 영원한 선포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제단 앞에 다시 서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신앙은, 나의 행위를 끝없이 반복하며 순종을 증명해야 하는 '그림자'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단번에 완성된 그분의 은혜를 그저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는 '실체' 위에 굳건히 서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모리아 산의 덤불 속에서 내가 바칠 '숫양'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갈보리에서 피 흘린 '어린 양'을 바라보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제단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실존적 갈림길이다.

 

작성 2025.11.17 01:49 수정 2025.11.1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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