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중동 분쟁에 대한 해결점 모색: 십자가 아래, 눈물과 희망의 땅

-하나님의 형상: 깨어진 거울 속 우리 모두의 모습.

-정의와 긍휼: 기울어진 저울과 하나님의 마음.

-십자가의 길: 화해와 용서라는 불가능한 희망.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메마른 바람이 역사의 먼지를 실어 나르는 땅,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약속을 속삭이셨고, 예수가 사랑을 가르치셨으며, 무함마드가 경전을 낭송했던 땅. 중동은 인류 영성의 요람이자, 문명의 교차로였다.

 

그러나, 오늘 우리 눈앞의 중동은 쉼 없는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폭격 소리는 자장가처럼 익숙해졌고, 아이들의 눈망울에는 공포와 슬픔이 강물처럼 흐른다. 연일 뉴스를 통해 접하는 파편적인 소식들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때로는 너무 멀고 복잡하게 느껴져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 땅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다. 그곳은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시작된 곳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형제자매들이 고통 받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제는 단순한 정치적 분석이나 해법을 넘어,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는 깊고 넓은 렌즈를 통해 이 오랜 갈등과 분쟁의 본질을 성찰하고, 감히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는 단순한 지적 탐구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이 어떻게 이 시대의 가장 깊은 상처와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응답해야 할 부르심에 대한 고민이다.

 

하나님의 형상: 깨어진 거울 속 우리 모두의 모습

 

중동 분쟁의 핵심에는 ‘나’와 ‘너’를 가르는 깊은 불신과 적대의 골이 있다. 민족, 종교, 이념의 이름으로 서로를 악마화하고, 존엄성을 짓밟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아파와 수니파, 정부군과 반군… 끊임없이 반복되는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인간은 수단으로 전락하고 생명은 파리 목숨처럼 가벼워진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선포한다.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말씀은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그 어떤 배경을 가졌든,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목적 아래 창조된 존재임을 선언한다. 폭탄 소리 너머, 폐허 속에서 울부짖는 아이의 눈물 속에서, 총을 든 젊은 병사의 불안한 눈빛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감상적 동정이 아니다.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증오를 퍼붓는 행위는, 상대방뿐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마저 깨뜨리는 영적 자해 행위이다. 테러리스트의 잔혹함에 분노하면서도, 그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때, 우리는 문제 해결의 첫걸음조차 뗄 수 없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만나는 이웃, 직장 동료, 심지어 우리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반영한다. 중동의 갈등은 우리 안의 ‘다름’에 대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은, 우리 모두의 깨어진 거울과 같다.

 

정의와 긍휼: 기울어진 저울과 하나님의 마음

 

중동 분쟁의 역사는 ‘정의’에 대한 처절한 부르짖음으로 가득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수십 년간 이어진 점령과 강제 이주, 차별 속에서 빼앗긴 권리와 터전을 외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기억과 주변 아랍 국가들의 적대 속에서 생존과 안보를 절박하게 부르짖는다. 양측 모두 자신들의 고통과 역사적 상처에 기반한 ‘정의’를 주장하며 평행선을 달린다.

 

성경은 정의(미쉬파트, Mishpat)와 공의(체다카, Tzedakah)를 하나님의 핵심적인 속성으로 강조한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4).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단순히 법적인 공정함을 넘어, 사회적 약자와 억눌린 자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어느 한쪽의 주장만을 절대적인 정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양측의 고통과 주장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 아래 무엇이 진정한 정의인지 분별하려 노력한다.

 

동시에, 성경은 정의만큼이나 ‘긍휼’(헤세드, Hesed)을 강조한다. 

 

긍휼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신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이다. 정의의 잣대만으로는 갈등의 골을 메울 수 없다. 수십 년간 쌓인 상처와 불신은 엄격한 법적 판단만으로는 치유될 수 없다. 용서와 화해, 약자의 아픔에 동참하는 긍휼의 마음이 없다면, 정의의 실현조차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레바논 내전 당시, 적대 관계에 있던 기독교인과 무슬림 공동체 사이에서 조용히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었던 작은 이야기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의사들이 함께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의 모습들은 척박한 땅에서도 피어나는 긍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긍휼을 잊은 채 살아가는가? 중동의 아픔은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다.

 

십자가의 길: 화해와 용서라는 불가능한 희망

 

정치적 해법, 경제적 지원, 국제사회의 중재… 지금까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중동의 평화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인간적인 지혜와 노력만으로는 이 깊은 상처와 증오의 역사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절망감이 들 때, 기독교적 세계관은 가장 역설적이고 급진적인 해답, 바로 ‘십자가’를 제시한다.

 

십자가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과 궁극적인 사랑의 상징이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 안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카탈라게, Katallage)의 길이 열렸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에베소서 2:14).

십자가는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는 예수님의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실체이다.

 

그렇다면, 중동 분쟁의 맥락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먼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죄인이며,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용서를 선택하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이끌었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용서 없이는 미래도 없다고 역설했다. 그의 신앙은 십자가의 용서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물론, 값싼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 규명과 정의 실현의 노력과 함께,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과 가해자의 진정한 회개가 동반될 때, 비로소 용서와 화해의 싹이 틀 수 있다.

 

수년 전, 이스라엘 군의 오폭으로 세 딸과 조카를 잃은 팔레스타인 의사 이젤딘 아부엘라이쉬는 “나는 증오하지 않을 것이다(I Shall Not Hate)”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고통과 용서의 여정을 세상에 알렸다. 그의 용기는 인간적인 분노를 넘어서는, 십자가의 사랑에 맞닿아 있는 깊은 울림을 준다. 이러한 이야기는 기적처럼 드물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처럼 우리에게 희망을 속삭인다.

 

우리 삶의 크고 작은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십자가의 길 대신 나의 의와 정당성만을 주장하고 있는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중동의 비극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묻고 있다.

 

행동하는 믿음: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역할

 

기독교적 세계관은 단순한 사유 체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며 행동의 동력이다. 중동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첫째, 기도이다. 중동 땅의 평화를 위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위정자들의 마음이 변화되기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무력한 자의 탄식이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께 연결되는 가장 강력한 행동이다.

 

둘째, 배움과 알림이다. 분쟁의 역사와 진실을 제대로 알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자극적인 뉴스 이면의 목소리들, 특히 현지 기독교인들의 생생한 증언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게 된 진실을 주변에 나누며, 무관심과 편견에 맞서야 한다.

 

셋째, 연대와 지원이다. 전쟁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에 동참하고, 현지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해 애쓰는 단체들(기독교 NGO, 교회, 평화 운동가 그룹 등)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비록 작은 손길일지라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절망 속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레바논이나 요르단 등지에서 시리아 난민들을 돕는 기독교 구호 단체들의 활동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넷째,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먼저 ‘샬롬’(평화)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만나는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중동의 평화를 향한 우리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길이다. 우리가 먼저 우리 안의 ‘중동’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외칠 수 있겠는가?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중동 분쟁의 해결은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쉬운 과제가 아니다. 뿌리 깊은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얽혀 있으며, 인간의 죄성과 욕망이 끊임없이 상처를 헤집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은 절망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은 인간적인 계획이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화평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이사야 11:6)라는 궁극적인 평화의 비전을 노래했다.

 

이것은 단순한 목가적인 풍경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적대와 갈등이 해소되고 온전한 샬롬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다. 우리는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사랑과 정의의 실천들을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눈물의 골짜기를 적시고, 우리의 작은 행동들이 모여 증오의 벽돌을 하나씩 허물어 갈 때, 비록 더딜지라도 하나님의 평화는 그 땅 위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임할 것이다.

 

십자가 아래에서 흘린 눈물은 절대 헛되지 않으며, 그 눈물은 마침내 기쁨의 열매로 피어날 것이다. 지금은 비록 짙은 어둠 속을 걷는 것 같지만, 우리는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마음으로, 깨어 기도하며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중동 땅에,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정한 샬롬이 깃들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작성 2025.11.04 09:55 수정 2025.11.04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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